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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교는 그 속에서 헤엄칠 뿐, 뭔가 짓는 게 아니다"
작성자 이**** (ip:)
  • 작성일 2021-04-06 13: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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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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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퇴계 종가 백세옹의 삶1. 내게 유교는 낯설다. 유수한 수원한의원명문가와는 거리가 멀고, 어려서부터 한학의 훈도를 받은 적도 없다. 고향은 일제 시대에 개발된 동해안의 포구. 산골 외가의 할아버지께서 동해안의 ‘갯가’ 청년에게 당신의 딸을 선뜻 내주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게 각인된 유교는 ‘호랑이 아재’라 불리는 5촌 당숙이다. 경북 포항 외지에 사시다 가끔 고향에 들르면 어린 조카들을 꿇어 앉혀놓고, 집안의 내력과 골골이 박힌 무덤의 주인들에 대해 장중하게 읊어대셨다.내용은 지루했고 무엇보다 무릎이 아팠다. 그분이 ‘떴다’하면 우리는 그림자에 놀란 송사리떼처럼 뿔뿔이 흩어졌고, 해가 진 뒤에야 집으로 기어들었다. 그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유교도 사라졌다. 대학 졸업 무렵, 불교의 ‘마음’에 사회성을 접목한 주자학에 빠져들면서부터 유교와 다시 만났다. 언어는 낯설고, 사유는 난해했다. 그 ‘외계어’를 붙들고 지금도 씨름 중이다.이제 겨우 까막눈을 면한 듯하나 문화체로서의 유교는 여전히 막막하다. 이를테면 유서 깊은 가문의 격조와 삶에 대해서, 그들의 계보와 네트워크, 상제례(喪祭禮)의 규모와 중국배대지절차, 교제의 양식과 가정 경제 등 그들의 ‘일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나는 유교의 중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유교는 500년 유교 속에 있지 않다. 제도는 낡았고 의례는 구습이 되었다. 모든 르네상스가 그러했듯 유교의 생명력 또한 문화적 외피, 실물적 전통 너머에서 책을 통해 피어날 것이다.”문화도 환경도, 가풍도 없는 곳에서 나는 오직 고전과 경서에 의지하여 유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을 개인적 차원의 심신(心身) 훈련에 적용하고자 했다.2. 명문가의 삶은 이와는 다르다. 숙고와 선택 이전에 이미 ‘짜인 삶의 기제’가 있었다. 집안은 보험비교사이트유교로 가득하고, 일거수일투족에 선조의 유훈과 가문의 법도가 배어 있다. 환경에 젖고, 몸으로 익힌 유교는 나처럼 머리로 더듬고, 손발은 따로 노는 ‘머슥한’ 유교와 격이 다르다.이번 안동 걸음에 퇴계 선생의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101)옹의 삶을 반추하면서 문득 내가, 유교를 포항꽃집엉뚱한 곳에서 그야말로 천착(穿鑿)하고 안배(按排)하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 멈칫했다. “유교는 그 안에서 헤엄치는 것이지, 땅 위에 건물을 짓는 파니일이 아닌지 모른다.” <2009 년 12월 27일자 중앙SUNDAY 3면>그분이 청년 시절에 쓴 시 한 수를 본 적이 있다. 100세의 나이에,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복원해낸 것이라 한다. ‘書樓瀟灑一燈明, 寒雨時添石澗鳴. 滿蟲聲何訴事, 搗衣永夜喚秋聲. (南岡書室偶吟)나는 결구의 힘이 미약하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동석한 정석태 교수는 ‘격과 운을 갖춘 시’라고 평가했다. “남강서실에서 우연히 읊노니. 서실은 깔끔하고 등불 하나 밝은데, 차가운 비에 불어난 시냇물이 우릉댄다. 섬돌에 가득한 벌레 소리,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긴 밤 춘천미용실새 다듬이 소리, 가을이 오나 보다.”이 시 또한 여느 선비들처럼 반영구학원풍경을 읊고 있다. ‘음품농월(吟風弄月)’이라, 그 시가 그 시 같고, “그래서 어쨌담”이라는 탄식을 자주 했는데, 이번에 그 비밀 한 자락을 엿본 듯했다. 즉 유교의 궁극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은 풍경 속에서 그저 자연이고자 한다. 거기 ‘사람’도 드러나지 않고 ‘일’도 드러나지 않는다. 의지와 의도는 최소화되어 있다. 인간의 일이란 단지 관계의 필드가 지시하는 대로 자연을 따름으로써 어느 시인의 말대로 다만 “풍경으로 피어나는 데” 있다고 여겼다.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오르듯” 자신 속의 자연의 약동에 몸을 맡기는 것을 유교는 예(禮)라고 불렀다.그곳은 자연의 과정이기에 ‘아무것도 별스럽지 않다’. 실제 유가(儒家)의 삶은 너무 평범해서 기이할 정도다. 사람들은 백세옹의 삶에서 별 특별한 사건이나 드라마를 기억해내지 못했다.3. 유교는 남과 구분된 독립된 개인은 없고, 의지는 미숙한 자연이며, 자유는 환상이거나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거기 행위자는 없고, 오직 특정한 필드 하에서의 ‘역할’만이 있다.이 같은 역류성식도염치료해석에 당장 반발할 사람이 많겠다. 정리하자면 나는 유교를 ‘덕성’의 관점에서 접근했고, 백세옹의 삶은 ‘역할’로 충실하다. 홍콩시립대 김성문 교수는 서구의 유교 연구에 이 두 논점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고 일러준 바 있다. 아이반호(Ivanhoe) 등의 스탠퍼드-미시간 학파는 욕창치료덕성 윤리(virtue-ethics)가 유교의 중심이라 믿는 데 비해 에임스(Ames)와 로즈몽(Rosemont) 등의 하와이 학파는 역할 윤리(role-ethics)를 통해 유교에 접근한다.에임스는 필드의 역할 속에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으며, 이 점에서 유교가 근대를 넘어선 포스트모던적 대안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자 아이반호는 “역할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고 그 중심에 덕성의 토대가 있다”고 반발하고, 이에 당뇨에임스는 그렇다면 유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묻혀버릴 것이라고 우려했다.나는 방법적으로 이 둘이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모순되지 않고 협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종국적으로 역시 덕성은 역할 속에 포섭된다. 소학(小學)의 행동을 익힌 후에 대학(大學)의 성찰과 지식으로 나아가라 하는데 내가 보기엔 순서가 거꾸로인 듯하다. 즉 “대학을 거쳐 소학으로 간다!” 삶을 이해한 후에야 행동은 의미를 띠게 되지만, 덕성은 역할의 다만 준비 단계일 뿐임도 알아야 한다. 역시 나는 아직 초보다.[ⓒ 중앙선데이 &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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